카테고리 없음

혜선율 굿이다

SMMA 2018. 7. 6. 00:13



, 헌제의 승은을 입어 임신한지 이미 다섯 달이나 되었다.’라고 묘사한 대목이 있다. 『삼국지연의』의 묘사에 의하면 동승은 헌제의 손위 처남으로 처구()라고 불렀으니, 국구()라고도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 혜선율20회의 회목에서는 바로 ‘동국구()가 내실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다.’라고 했고, 내용에서는 ‘거기장군 국구 동승에게 부탁할 만하다.’, ‘동 국구가 국난에 많이 분주했음을 짐이 평소에 잘 알고 있다.’라고 썼다. 이로 보면 헌제와 동승의 관계는 낭구(), 곧 처남매부 사이의 관계가 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후한서ᆞ헌제복황후전()』을 보면 ‘동승의 딸이 귀인()이 되었는데, 조조가 동승을 죽인 뒤에 귀인을 찾아서 죽였다. 헌제는 귀인이 임신했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살려주기를 요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동비()가 바로 동승의 딸이며, 따라서 동승은 당연히 헌제의 악장() 곧 장인이 되니 즉 국장()인 것이다.

『삼국지ᆞ선주전』에는 ‘헌제의 구()인 거기장군 동승이 황제로부터 의대 속의 밀조를 받았기에 그때 조공에게 주살되었다.’고 되어있다. 배송지의 주에는 ‘동승은 한나라 영제의 어머니인 동 태후()의 조카이니, 헌제에겐 장인()이다. 대저 옛날에는 장인 혜선율 이란 명칭이 없었기에, 구()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구()는 외구()를 지칭하는 것이니, 즉 악부()이다. 비록 처자()의 형제 및 부친을 통틀어 구()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여기서 지칭하는 것은 아내의 부친이지, 아내의 형제를 말하는 건 아니다.

나관중은 옹서 관계(婿), 즉 장인과 사위 관계를 낭구 관계, 곧 처남매부의 관계로 만들었으니, 그렇다면 이것


. 그러나 유대는 듣지 않고 마침내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황건군에게 피살되었다. 『삼국지ᆞ무제기』에 의하면 유대가 죽은 뒤 조조가 연주자사 직을 계승했다.

그러나 패국의 유대는 조조의 장령()이었는데, 처음에는 사공장사() 벼슬로 조조의 정벌전쟁에 따라다녔고 뒤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따라서 조조가 유비를 치도록 파견한 인물은 응당 패국의 유대이지, 동탁 토벌을 위해 모인 여러 제후 중의 하나이며 연주자사를 역임한 적이 있는 동래의 유대가 아니다. 그러나 나관중은 유비를 친 패국의 유대가 ‘이전에 연주자사였고 동탁 토벌을 위한 제후의 일진’ 혜선율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는 동래의 유대와 패국의 유대를 혼동한 것이 된다. 조조가 패국의 유대 혜선율를 파견해서 유비를 치게 한 건 건안 4년(서기199년)이니, 이 해는 동래의 유대가 죽은 지 이미 7, 8년이나 지난 후였다.

청나라 전대소()는 『삼국지변의()』 권일()에서, ‘건안 4년에 유대와 왕충을 보내어 유비를 쳤다.’는 기록 뒤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달았다. ‘조사해 보니, 패국 유대의 자도 공산이지만, 유요의 형은 아니었다. 동래의 유대는 건안 3년에 죽었다.’ 여기서 전대소가 두 사람의 유대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한 지적은 옳다. 하지만 동래의 유대가 죽은 시기는 건안 3년이 아니라, 초평 3년이다.






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장료가 조조를 향해 크게 욕지거리를 하고서도 풀려난 일이나, 유비와 관우가 나서서 전후 상황을 설명한 따위의 일은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묘사는 장료와 여포의 인품을 적절히 대비하여,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여포는 구해 주는 사람 없는데, 조조를 꾸중한 장료가 도리어 살아났다는 식으로 표현해서 적심충의()의 선비는 결국 의리가 반복무상한 소인배를 이긴다는 이치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효과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86회에서는 위 문제() 조비()가 황초() 5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치다가 오나라 장수 서성()의 화공에 크게 패배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조비가 목숨을 구해 창황히 달아나는 가운데 또다시 쇄도해 들어오는 정봉()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장료가 급히 말을 달려와 대적하는데, 정봉이 쏜 화살이 허리에 적중한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서황의 구원을 얻어 함께 조비를 보호하여 달아난다. 그리하여 장료는 허창()으로 돌아왔지만 화살 맞은 혜선율 상처가 도져 죽게 된다. 이에 조비가 후히 장사지내 준다.

그러나 장료의 죽음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지ᆞ장료전』 등의 기술에 의하면, 장료의 사망 시기는 황초 3년이지 황초 5년이 아니다. 그리고 장료가 병든 기간 역시 매우 길었는데, 병든 몸 혜선율을 불구하고 전투에 임하는 바람에 손권()이 크게 두려워 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화살에 맞은 상처로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은 장소도 강도()이지, 광릉()에서 화살에 맞고 허창으로 돌아와 죽은 게 아니다.

『삼국지ᆞ장료전』에는 ‘손권이 다시 위나라에 신하로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번신()을 자칭했다. 당시 장료는 옹구()에 주둔하고 있다가 질병을 얻었다. 황제는 시중 유엽()으로 하여금 태의를 대동하고 가서 병을 치료토록 했으며, 근위병들이 소식을 물어가며 길을 이었다. 질병이 완쾌되지 않자 황제가 장료를 맞이하러 그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는데, 수레로 몸소 가서 그의 손을 잡고 어의()를 하사했고, 태